이번주에는 제2대 평양교구장을 역임하시고 한국인 최초의 수녀원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를
창립하신 목요한 신부(John E. Morris)의 일생과 저희 집에서 고이 보관해온 사진을 소개합니다.
목요한 신부는 1889년 1월 1일 미국 매사추세스 Fall Riverdptj 에드워드 B 모리스와 요안나 헤네베리
부부의 3남 1녀 중 셋째로 출생.
1914년 6월 13일 사제서품을 받고 7 년간 고향의 성 요셉 성당에서 보좌 신부로 생활했다. 그는 1921년
1월 31일 미국 최초의 외방전교회인 메리놀회에 입회하여 베나드 메리놀 소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대략 2 년반 동안 메리놀외방전교회의 홍보활동에 임했다.
1923년 8월 24일 한국으로 발령을 받고 그해 11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그는 이내 자신의 이름을
목이세로 짓고 '목 신부'로 불리우길 즐기며, 한국 선교의 초석을 다지던 동료들로부터 "술주정뱅이처럼
한국말을 흥얼대다가 이내 보통 한국인같이 도도하게 말하는 언어의 마법사" 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1930년 4월 1일 방 신부의 후임으로 제2대 "평양 지목구장(교구장)"에 임명되어 1936년 7월 31일자로
포교성성에 사임서를 제출할 때까지 6 년간 자신의 역량을 다 바쳐 평양교구의 발전을 꾀하여
1935년~6년 메리놀의 동양 선교지들 가운데 교세확장 1위를 기록했다.
1932년 6월 27일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를 창설하였는데, 목요한 신부께서 선교사로 내한할
당시부터 한국 여성들이 복음 선포의 빼어난 도구가 될 소질이 있음을 체험하고 양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1934년 1월부터 창간된 <가톨릭 연구> 역시 문서선교의 지대한 영향력을 간파한
목 신부의 업적 중 하나다.
1934년 8월25일에는 평양교구 카톨릭운동 연맹을 조직 후원하여 북한 전역에 복음 전파와 카톨릭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1935년 10월 24일 위의 활동들을 토대로 "천주교 조선전례 150주년 기념식"을 평양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주도하였다.
1936년 9월 7일 일신상의 이유로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가,
1937년에서 1942년까지 일본 교또에서 한인사목을 하였고,
1942년에서 1944년 사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사목을 하였다.
그러다가 1959년 10월 16일 다시 내한하여 인천지역에서 본당사목을 하고,
1961년 12월 19일 귀국하여 다시 한인사목을 열중하였다.
1987년 7월 10일 선종하시기까지 목요한 신부는 외국인이면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였으며,
주님의 복음을 이 땅에 뿌리내리고자 애쓰신 한국 카톨릭의 자랑스러운 사제이시다.
첫번째 사진은 앞줄 윈쪽부터 부 신부님, 목요한 신부님, 노 신부님, 다음 신부님은 존함 모름,
뒤에 계신 분은 저의 친할머님 최현숙 안나이며 1959년에서 1961년 사이에 촬영한 사진인 것 같음.
두번째 사진은 목요한 신부님의 젊을 적 사진. 촬영연대는 모르겠음.
세번째 사진은 좌측에 계신 분이 목요한 신부님, 중앙에 계신 신부님의 송별식인 것 같음.
우측은 지금의 사목회장이시지 않나 생각됨.
마지막은 신문 스크랩인데 1941년 당시 "평양교구본부"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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